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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고, 부딪치고, 투자한 한국...중진국 덫을 넘었다”

DDOL KONG 2024. 8. 12. 03:25

[WEEKLY BIZ] [Cover Story] 한국을 ‘성장 수퍼스타’ 평가한 세계은행 소믹 랄 자문관 인터뷰

‘한때 국수를 만들어 팔던 삼성은 일본 기업 산요와 NEC로부터 기술을 빌려 국내 및 지역 시장에 TV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삼성의 성공은 엔지니어, 관리자와 숙련된 전문가에 대한 수요를 촉발시켰다. 이에 한국 정부가 나섰다. 교육부는 한국 기업에 필요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도록 국공립대에 목표를 설정해주고 예산을 늘렸다. 오늘날 삼성은 세계 2대 스마트폰 제조업체 중 하나로, 글로벌 혁신 기업이다.’


최근 ‘중진국 함정(The Middle-Income Trap)’이란 보고서를 낸 세계은행(World Bank)은, 이를 소개하는 보도자료를 내며 거의 4분의 1을 할애해 한국 기업과 정부의 이인삼각(二人三脚)이 어떻게 중진국 함정을 극복하고 한국 경제의 성공을 일궜는지 전 세계에 알렸다. 중진국 함정이란 경제 발전 초기에는 빠르게 성장하던 국가도 중진국 단계에 성장 동력을 잃어 고소득 국가에 이르지 못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241페이지짜리 보고서 원문에도 한국 찬사는 이어진다. 보고서는 한국을 ‘성장의 수퍼스타’로, 한국의 경제성장사를 ‘중진국 정책 입안자들이 봐야 할 필독서’라 표현한다. 중진국 함정에 빠질 우려가 있는 중진국 108국이 20~30년 내에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면 한국의 경제 발전 전략이 그 교과서가 될 것이란 조언이다.

세계은행은 왜 이리 한국의 경제성장을 격찬했을까. WEEKLY BIZ가 세계은행이 펴낸 보고서의 총책임자인 소믹 랄 세계은행 선임 자문관을 직접 화상 인터뷰했다. 그는 “한국은 행운이나 천연자원에 기대지 않고 선진국으로 뛰어오른 ‘환한 빛(shining light)’과 같은 존재”라고 했다. 교육·기반 시설에 대한 투자, 발 빠른 해외 기술 도입, 글로벌 기업과의 경쟁을 통한 혁신이 경제성장을 뒷받침했다는 설명이 뒤따른다. 랄 선임 자문관은 “이번 연구를 진행하면서 한국의 경제성장에 대해 매료됐다”고도 했다.


1990년 이후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34국 중에는 유럽연합(EU) 가입을 계기로 경제성장을 달성한 유럽 국가나 카타르·오만처럼 산유국이 많았다. 이와 달리 한국은 ‘3i(투자·기술 도입·혁신) 전략’을 교과서적으로 수행하며 1960년 1170달러 수준이었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을 3만2740달러까지 28배 수준으로 끌어올려 선진국이 됐다. 한국을 중진국 함정에 빠지지 않은 대표적 사례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게 랄 선임 자문관이 이끄는 세계은행 연구팀 분석이다.


“사람에 대한 투자가 경쟁력의 근간”

한국의 경제가 빛나게 된 이유로 세계은행은 ‘우수한 인재 양성’을 첫손에 꼽는다. 세계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각국의 고등학교(upper-secondary) 교육 이수율에서 한국은 단연 독보적이다. 한국의 고등학교 교육 이수율은 98.8%로 일본(95.5%), 미국(94%) 등 주요 선진국에 비해서도 높다. 랄 선임 자문관은 “교육과 인적 자원에 대한 투자가 (한국 기업이) 양질의 상품을 생산하고 세계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바탕이 됐다”고 했다.

-경제성장 초기 단계에서 한국 정부의 역할은.

“한국은 저소득 국가일 때나 중진국에 진입한 초기 시점에서 과감한 투자에 나섰다. 대표적인 것이 교육에 대한 투자다. 한국은 전 국민 대상으로 보편적인 초·중등 교육을 제공했다.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정책이었다. 소수의 부유한 엘리트 계층의 아이들만 교육을 받은 게 아니라 모든 국민이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이 한국과 중진국 함정에 걸린 국가들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1950년대 의무 교육을 시행하고 교육 예산의 80%를 초등 교육에 투입했다. 10년 정도 만에 취학률을 40%에서 90%대로 끌어올렸다. 이후로도 한국은 꾸준히 교육의 대상을 확장해 나갔다.”


-교육 외에 한국 정부의 투자가 성장에 도움이 된 부분이 있나.

“한국 정부의 투자는 초기 성장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부는 교육에 대한 투자뿐 아니라 전력망 같은 기반 시설 구축 및 확장에 투자해야 한다. 민간 기업들이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역시 정부의 역할이다. 안정적인 투자 환경을 조성하는 것 역시 정부가 할 일이다. 국내 기업뿐 아니라 해외 기업도 투자하게 유도하려면 투자할 만한 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여성의 노동 참여율이 오른 것도 긍정적으로 봤는데.

“한국은 (중진국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여성 근로자에게 ‘일할 권리’를 보장한 나라다. 여성 노동 참여율은 빠르게 높아졌고, 한국 경제는 여성 근로자들이 가진 강점을 잘 활용했다. 이는 경제성장 과정에서 일정 수준의 보상으로 돌아왔다. 1990년 한국의 경제력(구매력기준 1인당 GDP)은 2020년의 인도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이미 한국의 여성 노동 참여율은 51%에 달했다. 반면 2020년 인도에선 여전히 30% 수준이다.”

“일본을 배워 일본을 넘어섰다”

-투자를 통한 초기 성장 이후 한국은 어떤 노력을 이어갔나.

“한국 정부는 대기업들에 ‘세계로 나가 아이디어를 얻어오라’고 독려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삼성과 같은 대기업은 일본 기업인 NEC나 산요에 라이선스 수수료를 내고 기술을 배워왔다. 한국 정부는 기업에 수수료를 지원했다. 이것이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보유하게 된 시발점이었다. 한국 기업들은 해외 기업을 통해 기술을 완벽하게 익힌 다음 세계 시장에 통할 기술을 개발해냈다. 삼성과 같은 기업들은 금방 일본 기업들만큼 좋은 성과를 내게 됐고, 이후에 그들을 뛰어넘었다. 나중에는 일본 기업이 ‘우리는 뭐 먹고 살지’라는 마음에 라이선스 수수료를 올리자, 한국 정부와 기업이 협력해 자체적인 기술 혁신을 이뤄냈다.”

-한국의 패스트 팔로어(빠른 추격자) 전략은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모든 걸 자신의 노력으로만 달성한 국가는 없다. 한국도 일본에서 기술을 배워왔지만, 일본 역시 미국에서 기술력을 배워온 것이다. 중국 역시 초기에는 러시아의 기술 중 자신들보다 더 앞서는 게 있으면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 시기별로 차이도 있다. 우선 1970년대엔 미국이 ‘세계 지식 자본’에 있어서 독보적인 1등 국가였다. 이때는 대부분의 국가가 미국이 특허를 가진 기술을 빌려와 생산 공정 등에 활용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다가 2010년대 말 정도가 되면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과 미국 등 서방국가 사이 기술 수준 격차가 많이 줄었다. 한국 역시 글로벌 선진 기술의 빠른 도입에 힘쓰는 동시에 새로운 특허 기술을 개발해 내는 국가가 됐다. 이제는 한국이 글로벌 기술 개발에 매우 중요한 국가가 됐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정부는 기업을 지원했지만, 과보호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기업들의 혁신을 어떻게 이끌어냈나.

“한국 정부는 대기업을 지원했다. 동시에 그들이 개방된 시장에서 경쟁하도록 이끌었다. ‘적극적으로 경쟁에 나서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며 재벌들에 경쟁을 독려했다. 당장은 삼성과 현대의 제품이 글로벌 시장에서 통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재벌이 글로벌 기업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이들 기업도 더 나은 제품을 내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개방과 경쟁은 무척 중요하다. 기업들을 아이디어와 지식, 신상품의 ‘전선’에 몰아넣어야 경쟁을 통해 성장을 달성할 수 있다. 경쟁이 없다면 국가는 생산성이 있는 기업을 키워낼 수 없고, 경제성장은 둔화한다.”

-한국의 아시아 금융 위기 대응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는데.

“한국은 아시아 금융 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굉장히 용감했다. 모든 재벌을 보호하지 않았다. 일부 재벌이 도산하는 것을 용인했다. 그리고 위기를 기업 규율의 계기로 삼았다. 아시아 금융 위기를 통해 한국에선 ‘혁신의 본질’이 바뀌었다고 본다. 많은 혁신은 작은 기업, 업력이 짧은 젊은 기업에서 나온다. 한국은 아시아 금융 위기 이전엔 재벌 중심의 대기업들이 혁신을 이끌었지만, 그 이후로는 스타트업들이 혁신을 이끌게 됐다.”

-삼성 등 대기업 경영진의 노력은 어떻게 평가하나.

“삼성이나 현대 같은 대기업들이 만약 글로벌 무대에서 경쟁하지 않고 내수 시장에서 경쟁했더라면, 새로운 국내 경쟁자의 등장을 막아내며 비교적 쉽게 돈을 벌 수 있었다. 대기업들이 정말 그렇게 행동했더라면 한국 경제의 ‘혁신’엔 방해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대기업 총수들은 개방된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들은 혁신의 최전선으로 자신들의 회사를 계속 몰아넣었다. 국내 시장이나 해외 시장에서 더 많은 경쟁에 직면할수록 혁신의 동력은 증폭되기 마련이다. 물론 한국 정부가 계속해서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을 요구했기에 대기업들이 내수 시장 지배력에 집중하지 않은 측면도 없지는 않다.”


“선전하는 중국, 인도는 훨씬 뒤에 있다”

미국에 이어 세계 GDP 2위인 중국도 ‘중진국 함정’에선 자유롭지 못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앞으로 몇 년 안에 전체 경제 규모로 따져 독일과 일본을 누르고 세계 3위 경제 대국으로 올라설 전망인 인도도 선진국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할 것이란 예상이다. 랄 선임 자문관은 “(경제성장의 수준을 놓고 평가한다면) 중국은 매우 잘하고 있지만, 인도는 아직 훨씬 뒤처져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아직은 중진국 단계에 머무는 중국 경제를 평가한다면.

“중국은 매우 잘해나가고 있다. 투자를 꾸준히 늘려나가고 있고, 기술 도입에도 적극적이다. 디지털 기술도 잘 받아들였다. 글로벌 전기차 시장에서는 시장을 선도하는 수준의 기술력까지 갖췄다. 보호주의 무역 정책이 늘어난다고 해도 중국과 인도처럼 충분히 (자국 시장이) 큰 나라들은 작은 나라들에 비해 영향을 덜 받는다. 중국 정부가 내부적으로 꼭 필요한 정책들을 도입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중국 경제가 어느 정도 수준의 혁신을 달성할 수 있을지 결정될 것이다.”

-인도의 강점과 약점은 무엇인가.

“아직 인도의 1인당 GNI는 2500달러 수준이다. 이 단계에선 적극적인 해외 기술 도입으로 경제 발전을 도모할 충분한 여력이 있다. 인도는 디지털 아이디(ID) 시스템과 통합 결제 시스템을 구축했다. 덕분에 여성이나 사회적 약자들도 쉽게 금융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인도는 40년 전 한국처럼 경제성장을 이끌 적절한 수준의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인도는 (고등교육에 집중하면서 발생한) 초·중등 교육의 밀린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23/0003851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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