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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OLKONG

철학이 필요한 시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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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필요한 시간

DDOL KONG 2017. 7. 12. 03:51

 

- "지금 인생을 다시 한 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스님 임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이미 일어난 생각은 이어지지 않도록 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생각은 일어나지 않도록 하면 그대들이 10년 동안 행각(行脚)하는 것보다 좋을 것이다. 나의 생각에는 불법에는 복잡한 것이 없다. 단지 평상시에 옷 입고 밥 먹으며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임제어록]

- 나이가 들면 거울을 쳐다보는 일이 점점 줄어들게 마련이다. 어떤 이유로 젊은 시절 자주 보던 거울을 멀리하게 된 것일까? 모든 집착은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라져버렸거나 혹은 부재하게 될 때 발생한다.

- 당연히 이런 나에게 나의 것이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그것은 모두 인연이 있어서 내게 잠시 머무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도, 젊음도, 나의 아이도, 그리고 돈마저도 모두 그러하다. 그것들은 모두 인연이 되어서 나에게 왔고, 인연이 다해서 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 그것은 돈을 잃어버린 날,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 날, 우리는 기억에 사로잡혀 타자의 소리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집착에 빠지면 애정과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내 앞의 타자에 대해 신경쓸 수 있는 여유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 옛사람들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선비 정신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는 초월자에게 기대기보다는 자신 스스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다는 비범한 인문적 정신이었다. 그렇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대천명(待天命)이란 말 그대로 초연했다. 기독교가 서학西學이란 이름으로 들어왔을 때, 최제우는 서학이 인문정신에 반한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그가 동학東學이란 종교를 창시한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 동학은 종교의 성격을 가지고는 있지만 서학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즉 기독교가 인간 외부의 초월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초월종교였다면, 동학은 인간 내부에서 신성을 찾았던 내재종교였기 때문이다. 결국 신은 우리 외부가 아니라 우리 내면에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서학에 맞서려는 동학의 핵심 정신이었다.

- 라베송은 "습관은 그것을 낳은 변화를 넘어서 존속하는 것"이라고 했다. 습관에 대한 라베송의 논의는 인간의 뇌와 관련된 최근의 과학적 연구와 부합된다. '오래된 뇌'가 행동을 담당하고 '중간 뇌'가 정서를 관장한다면, '새로운 뇌'는 합리적인 사유를 담당하고 있다.

- 습관의 메커니즘은 수영이나 테니스와 같은 운동에도, 시를 짓거나 철학책을 쓰는 것에도, 심지어는 타인을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경우에도 습관의 논리는 그대로 관철되어 있다.

-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낯섦이 찾아오는 바로 그 순간이 우리의 생각이 깨어나 활동하기 시작하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하이데거를 통해서 이제 우리는 자신이 항상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분명 우리는 생각을 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항상 예상치 못한 사건과의 조우를 통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 종정으로 추대되던 날 성철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는 사자후를 토한다.

- 결국 자신의 마음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그것을 어떻게 고칠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행은 길을 잃게 될 것이다.

- 햇빛이 비춘다고 해서, 바로 그 순간 쌓였던 눈이 일순간에 사라질 수 있을까? 아마 힘들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광학은 무엇보다도 빛, 그리고 그것을 느끼는 눈에 대한 사유라고 할 수 있다.

- 만약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면, 그들은 그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반면 처절한 노력으로 성공했다면, 그들은 그것이 자신의 노력 때문만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도대체 그들은 어떤 속내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은 인간의 능동성과 자유를 강조하는 서양 전통에서 제대로 풀리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동양의 옛사람들의 글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이 의문에 답을 줄 수 있는 구절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일을 모두 다 하고, 천명을 기다린다.'는 의미를 가진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유명한 구절이다.

- 자신의 마음을 다한 사람은 자신의 본성을 알고, 자신의 본성을 아는 사람은 '하늘天'을 안다. (......) 요절하든 장수하든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을 닦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하늘의 명령(天命)을 세우기 위해서다.      -맹자

- 드디어 우리는 '진인사대천명'이란 익숙한 말이 얼마나 무서운 교훈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이 말의 논점은 바로 '진인사', 즉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한다.'는 구절에 있다.

- 모든 인간은 죽는다. 그렇지만 죽음은 혼자 걸을 수밖에 없는 외로운 길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도 죽음의 문턱까지만 따라올 뿐 그 다음부터는 오직 나 혼자 가야만 한다. 그래서 죽음은 지독하게 무섭고 두려운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험 업계는 죽음에 대한 우리의 공포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의 공포를 가중시키고, 그를 통해서 오늘도 새로운 보험 가입자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고민하느라 지금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될 것을 놓치고 있는것 아닌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죽는 존재이기에 앞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가장 두려운 악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자유가 없다면 책임도 있을 수 없다.

- 인간은 "자기 자신과 다른 이성적 존재자를 단순히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항상 동시에 목적 자체로 취급해야 한다."고 말이다.

- 20세기 이후 현대 인문학의 고뇌를 대변하는 키워드는 두가지이다. '타자 the other'와 '차이 difference'가 바로 그것이다.

- 한 마디로 말해 우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타자가 어떤 조건에 얽매여서가 아니라 어느 조건에 처하더라도 반드시 나를 선택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 윤리란 타인에 대한 주체의 애정이나 배려, 그리고 주체의 자율적인 결단을 전제해야만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 자공이 물었다. "평생 동안 실천 할 만한 한 마디 말이 있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바로 서恕다!  자기가 바라지 않는 일은 남에게 행하지 말아야 한다."      - 논어[위령공]

- 맹자가 정초했던 윤리학은 우리의 동정심에 기초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 할 수 있었다. 맹자에 따르면 동정심과 같은 윤리적으로 선한 본성을 현실화시킬 수만 있다면, 누구든지 선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 결국 정약용에게 인의예지라는 유학의 가치 덕목은 마음의 본성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주체적 노력과 실천을 통해서 달성될 수 있는 덕목들이다. 그래서 그는 인의예지란 가치 덕목은 우리에게 내재하는 본성이 아니라 '우리의 실천[行事]'을 통해서만 확립되는 무엇이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 아렌트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서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권리'가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만 할 '의무'라고 강조한다.

- 불교에서도 우리의 삶이 고해, 즉 고통의 바다에 내던져져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다른 인간이나 다른 생명체도 나와 마찬가지로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vulnerability', 즉 보호받아야 하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지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감성의 차원에서도 알고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고통에 빠진 타인을 보았을 때 그와 비슷하게 고통을 느낀다면, 그 사람은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정호는 단호하게 그렇다고 이야기한다. 정호에게 인이란 개념은 다른 무엇보다도 고통의 공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은 맹자가 강조했던 측은지심 惻隱之心의 의미이기도 하다.

- 삶이란 고통이자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라는 통찰이다.

- 타자와 공존할 수있는 지혜를 갖추지 않는다면, 인류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음을 비운다고 해서 타자와의 소통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나 자신의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타자와 소통하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 결코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우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즉 타자에 대한 선입견을 비우는 데 최선을 다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기다려야 한다.

- 비판적이고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은 상대방의 역린을 읽을수 있는 수사학적 감수성이 없다면 빛을 발할 수 없는 법이다.

- 촉각으로 접할 수 있는, 즉 자신이 직접 몸으로 부딪쳐 느낄 수 있는 구체적인 현실 세계에 지속적으로 개입하여 현실 감각을 키워야 한다. 단지 이것만이 권력과 자본이 내건 집어등의 유혹으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 회자정리[會者定離] : 만난 것은 반드시 헤어진다.

- 우리가 자연스러운 삶을 가장 즐겁게 영위할 때 소통과 공감은 기대하지 않아도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 유비가 어떻게 조자룡을 얻게 되었는지를 철학적으로 숙고해야만 한다. 한비자는 "덕(德)은 득(得)이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덕은 단순히 도덕적인 품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얻는 대상은 사람이다. 통치자의 덕이라면 그것은 탁월한 신하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덕이란 글자는 '얻는다'는 뜻의 '득得'이란 글자와 '마음'이란 뜻의 '심心'이란 글자가 합성되어 있다. 이처럼 진정한 덕은 바로 사람의 마음을 얻는 데서 그 빛을 발한다.

- 노자의 [도덕경] : 빼앗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주어야만 한다. 이것은 '은미한 밝음(微明)'이라고 말한다. 유연하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법이다. 물고기는 연못을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되고, 국가의 이로운 도구는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 사랑은 몸으로, 즉 실천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의 고난과 고통을 기꺼이 대신하려는 마음에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사랑이란 말은 하나의 미사여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언제나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니까 가난한 것이다.

- 이상이란 나는 이렇게 살아가겠다는 이념이자, 동시에 자신의 삶을 자신이 결정하겠다는 자유정신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 하위징아는 소중한 교훈을 준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수단이면서 목적일 때 우리는 기쁨으로 충만한 현재를 살 수 있는 반면 자신의 행동이 무엇인가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면 고단함으로 충만한 현재를 견디고 있다는 것이다.

- 지금 우리는 대의민주정치를 따르고 있다. 우리는 대표자에게 자신의 권리를 일정 기간 양도한다. 그러나 과연 자신의 권리를 타인에게 양도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만약 권리를 양도했다면, 그 순간 우리는 권리를 가지지 않은 자, 즉 노예로 전락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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