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OLKONG
언어의 온도 본문
- "아직 열이 있네. 저녁 먹고 약 먹자." 손자가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며 대꾸했다.
"네 그럴게요. 그런데 할머니. 할머니는 내가 아픈 걸 어떻게 그리 잘 알아요?
"그게 말이지. 아픈사람을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이란다....."
상처를 겪어본 사람은 안다. 그 상처의 깊이와 넓이와 끔찍함을. 그래서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에서 자신이 겪은 것과 비슷한 상처가 보이면 남보다 재빨리 알아챈다. 상처가 남긴 흉터를 알아보는 눈이 생긴다.
- 흔히들 말한다. 상대가 원하는 걸 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건 작은 사랑인지도 모른다. 상대가 싫어하는 걸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큰 사랑이 아닐까.
- 우린 늘 무엇을 말하는냐에 정신이 팔린 채 살아간다. 하지만 어떤 말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말하는냐가 중요하고, 어떻게 말을 하는냐보다 때론 어떤 말을 하지 않느냐가 더 중요한 법이다. 입을 닫는 법을 배우지 않고서는 잘 말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끔은 내 언어의 총량에 관해 고민한다. 다언이 실언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종종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 물어본다. 말 무덤에 묻어야 할 말을, 소중한 사람의 가슴에 묻으며 사는 건 아닌지....
- 음식을 맛보며 과거를 떠올린다는 건, 그 음식 자체가 그리운 게 아니라 함께 먹었던 사람과 분위기를 그리워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운 맛은, 그리운 기억을 호출한다.
- 위로는, 헤아림이라는 땅 위에 피는 꽃이다. 상대에 대한 '앎'이 빠져 있는 위로는 되레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한다. 상대의 감정을 찬찬히 느낀 다음, 슬픔을 달래 줄 따뜻한 말을 조금 느린 박자로 꺼내도 늦지 않을 거라고 본다.
- 본질은 다른 것과 잘 섞이지 않는다.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언젠가 의도하지 않은 순간에 엉뚱한 방식으로 드러나곤 한다.
- 질문만으로 현실의 문제를 일시에 해소할 수는 없다. 다만 질문은, 답을 구하는 시도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정말 좋은 질문은, 무엇이 문제인지 깨닫게 한다. 그리고 문제를 인식하는 순간이야말로 문제를 해결하는 첫번째 발판인지 모른다. 호기심이 싹틀 때 "원래 그렇다"는 말로 억누르지 않았으면 한다. 삶의 진보는, 대게 사소한 질문에서 비롯된다.
- 눈물은 눈에만 있는 게 아닌 듯하다. 눈물은 기억에도 있고, 또 마음에도 있다.
- "세월이 흐른 뒤 어렴풋하게 깨달았어요. 아니 겨우 짐작합니다. 길을 잃어봐야 자신만의 지도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진짜 길을 잃은 것과 잠시 길을 잊은 것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 어쩌면 어머니란 존재는 험난한 과정을 거쳐 세상 밖으로 나온 우리에게, 신이 선사하는 첫 번째 기적인지도 모른다.
- 그래, 어떤 사랑은 한 발짝 뒤에서 상대를 염려한다. 사랑은 종종 뒤에서 걷는다.
- 활활 타오르던 분노는 애당초 내 것이 아니라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서 잠시 빌려온 건지 모른다. 빌려온 것은 어차피 내 것이 아니므로 빨리 보내줘야 한다. 격한 감정이 날 망가트리지 않도록 마음속에 작은 문 하나쯤 열어 놓고 살아야겠다. 분노가 스스로 들락날락하도록, 내게서 쉬이 달아날 수 있도록.
- 종종 공백 이란게 필요하다. 정말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무언가 소중한 걸 잊고 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때 우린 마침표 대신 쉼표를 찍어야 한다. 공백을 갖는다는 건 스스로 멈출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제 힘으로 멈출 수 있는 사람이라면 홀로 나아가는 것도 가능하리라. 그러니 가끔은 멈춰야 한다. 억지로 끌려가는 삶이 힘겨울수록, 누군가에게 얹혀가는 삶이 버거울수록 우린 더욱 그래야 하는지 모른다.
- 흐르는 것은 흘러 흘러 제자리로 돌아오는 속성을 지닌다. 여행길에 오른 사람은 언제가는 여행의 출발지로 되돌아 온다. 돌아갈 곳이 없다면 그건 여행이 아니라 방황인지도 모른다. 행여 여행길에서 하염없이 방황하고 있다해도 낙담할 이유는 없다. 방황이 끝날 무렵 새로운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훗날 그 방황은 꽤 소중한 여행으로 기억될 테니까.
- 우린 어떤 일에 실패했다는 사실보다, 무언가 시도하지 않았거나 스스로 솔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더 깊은 무력감에 빠지곤 한다. 그러니 가끔은 한 번도 던져보지 않은 물음을 스스로 내 던지는 방식으로 내면의 민낯을 살펴야 한다. '나'를 향한 질문이 매번 삶의 해법을 제공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삶의 후회를 줄이는데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살다 보니 그런듯하다.
- 느끼는 일과 깨닿는 일을 모두 내려놓은 채 최대한 느리게 생을 마감하는 것을 유일한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순간, 삶의 밝음이 사라지고 암흑 같은 절망의 그림자가 우리를 괴롭힌다. 그때 비로소 진짜 늙음이 시작된다.
- 나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살다보면 싸워야 할 대상이 차고 넘치는데 굳이 '나'를 향해 칼끝을 겨눌 필요가 있을까 싶다. 자신과의 싸움보다 자신과 잘 지내는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 볼 준비가 안 돼 있는데, 느낄 여유가 없는데,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낀다는 말인가.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때 우린 행복하다.
- 살면서 내가 용서해야 하는 대상은 '남'이 아니라 '나'인지 모른다. 우린 늘,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