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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 [홍진채의 Via Negativa] 페트로달러 체제가 무너진다!? - 버핏클럽 본문

투자

[공유] [홍진채의 Via Negativa] 페트로달러 체제가 무너진다!? - 버핏클럽

DDOL KONG 2023. 4. 27. 04:11

이 글은 특정 종목이나 업종의 매수매도를 추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투자의사결정은 각자의 판단과 책임 하에 하여야 합니다.

페트로달러는 잊을 만하면 다시 등장하는, 음모론자들의 단골 메뉴입니다. 요 근래에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위안화로 석유 결제를 시작하면서, '페트로달러 체제가 무너진다 우와와'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가 무너진다 우와와 도망쳐' 이런 소란이 일어납니다. 이런 주장은 극히 일부분 진실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호들갑 떨 일은 아닙니다. 페트로달러가 허상이라거나 페트로달러를 언급하는 사람들이 모두 음모론자라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정도는 제대로 알자는 이야기입니다.

1. 화폐의 가치는 무엇으로 뒷받침되는가.

이건 이 얘기만으로도 한 시간 넘는 강의가 되어야 하는데요. 긴 얘기 생략하고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화폐는 '화폐 사용을 강요하는 권위체가 존재'하고, 그 안에서 '해당 화폐를 사용한 거래'가 일어나면 존재 요건이 성립합니다. 작은 공동체에서도 어디서든 누군가가 '이것을 화폐로 사용하라'고 '강요'할 수 있다면 새로운 화폐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화폐의 힘인데요. 화폐의 힘은 곧 1) '그 권위자가 앞으로도 화폐 사용을 강요할 수 있는가' 더하기 2) '실제 거래에 사용하기에 용이한가'로 결정됩니다. 화폐의 힘에는 위계가 존재하고, 화폐 사용을 강제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권위체는 국가이며, 국가가 화폐 사용을 강제하는 가장 간단한 수단은 세금입니다. 1)이 충족되고 2)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해당 화폐는 세금을 충당할 정도로만 사용될 테고요. 국가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여 1)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2)를 충족하는 대안 화폐(금, 제3국 통화, 비트코인, 백화점 상품권 등)가 화폐로 대두되기도 합니다.

화폐가 내재적으로 가치를 지니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은데, 이견이 많은 이유가 바로 위 내용 때문입니다. 화폐는 우리 사회에서 분명 어떤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가치를 지니기는 할 텐데, 그 가치가 눈에 보이는 금덩어리 같은 게 아니다 보니 많은 혼란이 있는 것이지요. 특히나, 우리가 기억하는 최근의 역사에서도 '금본위제' 같은 시스템을 채택해왔기 때문에, 금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현대의 신용화폐라는 게 도대체 어떻게 가치를 지니는지에 의구심을 품을 수 있고, 누군가가 그럴싸한 이론으로 신용화폐의 가치를 공격하면 '아 그렇구나'라고 수긍해버리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게 어찌 보면 신용화폐의 취약점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요, 국가가 강제하는 법정화폐는 거기에 대응하는 수단이 상당히 마련되어 있습니다.)

화폐라는 건 원래 신용에 기반했습니다. 주화는 단 한 번도 거래의 주요 수단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욕구의 이중적 일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품화폐가 등장했다고 하지만, 이 또한 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화폐에 대한 역사는 가상의 소설일 뿐이며, 상품화폐에 기반한 이론은 틀렸습니다. 이 얘기는 길어지니까 이 정도로 할게요. 더 궁금한 분은 제프리 잉햄의 《돈의 본성》,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부채, 첫 5,000년의 역사》 등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책입니다.)

여기서 머리에 넣고 갈 개념 하나는 이겁니다. 화폐의 힘은 화폐 사용을 강제하는 권위자의 힘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경제활동의 지속가능성 및 사용의 편리함에서 나옵니다. 금이나 석유 같은 현물로 그 힘을 뒷받침하는 건 그 신뢰를 유지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논리적으로나 실증적으로나 현물이 아니라 신뢰에 의해서 화폐의 힘은 좌우되었습니다.

2. 페트로달러는 뭔데.

1971년 닉슨 쇼크부터 이야기해야겠죠. 1944년부터 서구 경제는 브레튼우즈 체제라는 화폐 제도를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전 세계의 금을 미국에 모으고, 금과 달러를 일정 비율로 고정하고, 주요국의 환율을 달러 대비 일정 범위의 비율에 묶어두는 체제였습니다.

이를 달러 패권의 시작이라고 보기도 하는데요. 기본적으로 화폐가치가 안정되지 않으면 경제가 굴러가기 어렵기 때문에, 2차대전이 끝난 후 전 세계가 피폐해져서 화폐가치가 신뢰받지 못하던 상황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인 미국이 중심에 서서 화폐가치 안정에 기여한 겁니다. 그걸 패권(이라 쓰고 깡패짓이라고 읽는)이라 부르든 말든 간에, 44개국이 합의를 본 거고, 그 체제하에서 전후 경제 복구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50년대에 유럽의 경제가 복원되고 60년대 들어 미국과 어깨를 견줄 정도가 되자 유럽 국가들은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탈피하고자 합니다. 브레튼우즈 체제를 미국의 패악질이라고 부르는 건 그들의 자유지만, 반대 관점에서 보자면 유럽이 미국을 이용해먹고 버린 거라고 볼 수도 있죠. 국제 정세를 선악의 논리로 보면 많은 오류에 빠집니다.

프랑스를 필두로 '달러를 쓰지 않겠다, 그냥 금을 돌려달라'라고 하고, 금보유고가 고갈되던 미국이 결국 '안 줄래!'를 선언해버린 게 닉슨 쇼크입니다. 그렇게 소위 '달러 패권'이 흔들리던 와중에, 미국의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가 1973년 11월에 사우디아라비아로 날아가서, 국제시장에서 석유를 사고팔 때 반드시 달러로만 결제해야 한다는 계약을 체결합니다. 이후에 다른 중동 국가도 여기에 동참하면서 '페트로달러' 시대가 개막됩니다.

이를 통해 미국이 '닉슨 쇼크로 인해 붕괴될 위기에 처한 달러 패권 체제를 공고히 했다'라는 해석이 대두됩니다. '화폐의 가치가 실물로 뒷받침되어야만 한다'는 관점에서는 그럴싸한 설명이죠. 전 세계의 금을 강탈해서 미국에 보관해두는 금본위제로 달러 패권을 유지하다가, 금이 고갈되니까 이제는 새로운 에너지원인 석유로써 달러의 가치를 뒷받침하겠다는 거죠. 근데 그 석유 결제를 이제 위안화로도 하게 되었으니, 어이쿠야, 70년 동안 유지된 달러 패권이 이제 무너지게 되었네요. 그리고 하필 미국과 분쟁 중인 중국의 화폐가 달러 패권을 위협하고 있으니, G2가 한바탕 전쟁을 앞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섭습니다.

에휴.

3. 달러 수요와 페트로달러

달러 패권이니 어쩌니 하는 말은 차치하고, 일단 달러 수요가 도대체 얼마인지나 좀 이야기해봅시다. 화폐의 힘이란 곧 '그 화폐를 이 세상에서 얼마나 필요로 하는가'이지 않겠습니까? 돈이란 다른 무엇보다 측정하기 쉬운 개념입니다. (애초에 무언가를 측정하고자 나온 개념이 돈입니다. 계산화폐라고 합니다.)

돈의 크기는 M2 등으로 측정이 됩니다만, 그건 풀려 있는 돈의 액수, 즉 캐파일 뿐입니다. 실제로 얼마만큼의 돈이 우리 생활에 사용되었는지는 다른 방법으로 측정해야 합니다. 화폐는 거래할 때 사용합니다. 거래를 할 때 다른 화폐가 아닌 달러를 사용하여 거래를 하였다면, 그만큼 달러 수요가 많은 거겠지요. 그렇다면 달러를 사용한 총 거래액이 바로 달러 수요일 것입니다. 어떻게 계산해볼까요?

일단 미국 내에서 거래는 모두 달러로 이루어지겠지요. 그럼 미국의 GDP만큼은 달러 수요일 것입니다.

그리고 달러는 기축통화로서 국제무역에서 많이 쓰입니다. 국제결제에서 달러 결제 비율은 약 40%입니다. 그럼 국제무역액의 40%는 달러 수요겠네요.

이 둘을 더해봅시다. (이러면 순수출이 더블카운팅되기 때문에 미국의 순수출액을 빼줘야 할 것 같긴 한데, 어차피 무역적자국이니까 넘어가겠습니다.)

미국의 2022년 총 GDP는 25.46조 달러입니다. 같은 해 국제무역액은 32조 달러였습니다. 40% 하면 12.8조 달러입니다. 둘을 더하면 38.26조 달러입니다. 작년 한 해 지구인은 경제를 영위하기 위해서 38.26조 달러를 필요로 했습니다.

그럼 여기서 페트로달러 수요는 얼마나 될까요? 22년은 자료를 못 찾겠고, 21년으로 보면 9,826억 달러만큼 원유가 수출되었다 합니다. 대충 1조 달러라고 합시다. 여기서 달러거래액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니 100%라고 합시다. 전체 38조 달러에서 1조 달러가 차지하는 비율은 2.6%입니다.

즉, 페트로달러라고 부르는 뭔가 어마무시해 보이는 체제가 전체 달러 수요에 기여하는 정도는 2.6%라는 거고요. 앞으로 원유를 100% 달러가 아닌 다른 화폐로 결제한다 하더라도, 연간 달러 수요에서 2.6%가 감소한다는 겁니다. 10년 후 원유의 달러 결제 비율이 얼마나 줄어들까요? 반토막이 난다고 해봅시다. 10년간 1.3% 감소합니다. 선형으로 감소한다면 매년 0.13% 감소하는 거죠. 얼마나 호들갑을 떨 일인지는 알아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4. '써야만 한다'와 '쓸 수 있다'

거래를 할 때 어떤 화폐를 쓰느냐는 각자의 선택입니다. 사우디가 달러로'만' 결제할 수 있도록 합의를 해준 건 그만한 반대급부가 있기 때문이겠죠. 사우디는 정세가 정리되지 않은 중동에서 맹주 자리를 원했습니다. (이란, 이집트, 이라크 등 중동의 맹주를 자처하는 국가는 많습니다.)

사우디는 원유와 달러를 교환합니다. 이 달러는 어디에 쓰죠? 미국의 무기와 교환하는 데 씁니다. 단지 무기 교환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미군이 주둔하면서 중동 정세에 개입하는 교두보가 됩니다. 미국은 '달러 사용이 강제되는' 강력한 수요를 얻고, 사우디는 중동의 맹주가 될 수 있는 강력한 우방국을 얻습니다. 윈윈이죠. 유럽이 배가 불러서 미국에 등을 돌리는 상황에서, 마침 오일 쇼크를 얻어맞고 에너지 안보가 시급한 미국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게 2010년대 이후에는 깨지기 시작합니다. 미국은 셰일오일로 에너지 독립을 이루었습니다. 금융위기 정리하느라 바빴고, 굳이 중동에 개입할 필요가 점점 줄어듭니다. 그러다가 중국이 부상하니까 2011년 'Pivot to Asia'를 선언합니다. 까슈끄지 사건도 제대로 해소되지 않았고, 지금은 잊혔지만 'IS'를 사우디가 지원했다는 의혹이 생기면서 관계는 점점 악화됩니다. 미국은 사우디를 버리고 이란과 친해지는 노선을 선택했습니다. 급기야 2022년에는 사우디에서 미군이 철수합니다.

혹자는 이를 두고, "미국이 사우디에서 철수하고도 패권을 유지할 수 있을 줄 알았더냐? 석유 위안화 결제로 중국과 사우디가 합작해서 미국의 뒤통수를 쳤다. 이는 미국이 자초한 일이며 외교적 실패다."라고 조롱하기도 하는데요. 미국이 그걸 예상하지 못하고 사우디에서 철수했을 거라고 하는 건 외교관들을 너무 무시하는 판단입니다. BP는 이미 2020년에 위안화로 석유를 결제했습니다. 미국 입장에서 중동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낮아졌고, 페트로달러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달러는 충분히 강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사우디를 버린 겁니다. 앞뒤를 바꿔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중국은 사우디에 무엇을 제공할 수 있나요? 사우디는 석유와 교환한 위안화를 어디에 쓰죠? 중국의 제품과 교환하는 데 쓸 수 있습니다. 이미 사우디는 중국의 주요 교역국입니다. 중국의 전체 수출에서 사우디의 비중은 2014년 13.4%로서, 미국(13%)보다 큽니다. 2017년 사우디의 수입액 중 중국이 15.3%로 가장 크고요.

굳이 달러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 나라의 화폐로 그 나라의 상품을 구매하려는데 굳이 제3국의 화폐를 쓸 필요가 없지요. 양국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선택이고, 이걸 미국이 굳이 간섭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걸 간섭하기 위해서는 또 무언가를 내놓아야 할 텐데, 그럴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겠지요. (물밑에서 딜 시도는 분명 있었을 겁니다.)

5. 기축통화

위 논의를 좀 더 일반화해봅시다. 양국 간 거래에서 제3국의 통화를 왜 쓰는 걸까요? 대답은 이미 1-4번의 논의에서 나와 있습니다.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화폐는 권위체가 사용을 강요함으로써 형성된다고 말씀드렸죠? 화폐의 가장 강력한 기능은 '비인격적 신뢰로 인한 거래 창출'입니다. 화폐를 사용한 거래는 사실 채무의 이연입니다. A와 B가 거래를 할 때 A가 B로부터 원하는 것과 B가 A로부터 원하는 것이 동시에 충족되기는 지극히 어렵습니다. 어느 한쪽은 채무를 남기게 됩니다. 그 채무를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게 바로 화폐를 사용한 거래입니다. ('부채의 화폐화'라고 합니다.

화폐를 사용하지 않고 채무 이연을 시키려면 상대방의 채무 이행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 '인격적 신뢰'에 기반한 거래라고 합니다. 소규모 공동체에서만 이러한 채무 이연이 가능하죠. 거래당사자가 아닌, 양 당사자가 신뢰할 수 있는 제3자가 발행한 채무를 결제 수단으로 사용하면, 거래당사자 사이에서는 상호 신뢰에 기반하지 않고서도 거래가 성사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거래 권역이 넓어지면 공동체의 생산성이 증가하지요. 이게 국가의 구성원들이 국가가 발행한 화폐를 사용하는 원리입니다.

이 원리를 국민 간 거래가 아닌 국가 간 거래로 확대해볼까요? 한국과 일본이 무역을 할 때 각 상대방이 원화나 엔화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거래가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물물교환이라는 극히 희귀한 수단을 동원해야지요. 이때 한일 양국이 모두 신뢰할 수 있는 어떤 자가 발행한 채무를 교환 수단으로 삼는다면 양자가 서로를 신뢰하지 않더라도 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달러가 등장하지요.

달러를 사용하는 이유는 누가 머리에 총을 들이대고 사용을 강제해서가 아닙니다. 금이나 석유로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 나라가 생산력이 강하고, 앞으로도 계속 세금을 거둬들일 힘을 보유할 거라는 믿음을 거래 양 당사국이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은 왜 어떻게 공유할 수 있을까요? 바로 미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입니다. 창의적인 기업들이 혁신적인 제품을 계속 만들어내고, 고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계속 소비를 해주는 등 미국의 경제가 잘 굴러가고, 또한 미국이 타국에게 침략당해서 군사적으로 패배해서 조세징수권이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믿음입니다. 또한, 그들이 사용하는 달러를 계속 타 국가도 사용할 수 있도록 자본이동을 앞으로도 자유롭게 풀어줄 거라는 기대가 있기에 달러는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자국의 화폐가 국외로 유출되는 걸 극히 꺼리는 중국을 생각해봅시다.)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지위가 약해지는 때는 미국의 경제가 무너지고 타국에 군사적으로 밀릴 때입니다. 석유를 위안화로 결제한다 해서 미국의 경제가 무너질까요? 아니면 중국의 군사력이 갑자기 미국을 뛰어넘게 될까요?

6. 시뇨리지라는 환상

화폐에 대한 애먼 믿음 중에 '시뇨리지'라는 게 있습니다. 화폐 발행 권한을 가진 자는 발권력을 동원해서, 즉 돈을 마음대로 찍어내서 소비할 수 있다는 거죠. 뭐 사전적으로 틀린 이야기는 아닌데요. 1번에서 언급했다시피 화폐는 원래 권력과 함께 갑니다. 화폐는 누구나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걸 남들이 사용하게 하려면 그만한 힘이 있어야 합니다. 발권력이 있어서 권력이 있는 게 아니라, 권력이 있어서 발권력이 있는 거죠. 앞뒤를 헷갈리면 안 됩니다.

이걸 이해하지 못해서, 혹은 의도적으로 반대로 해석함으로써 미국 = 깡패국가 이미지를 강화시키는데요. 달러가 기축통화가 됨으로써 물론 미국이 얻는 게 있지만, 그만큼의 비용이 들어갑니다. 미국이 얻는 건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채권을 끝없이 발행해서 소비로 연결시킵니다. 근데 그게 공짜가 아닙니다. 미국은 전 세계에 군사력을 투사하면서 무역의 안정을 도모합니다. 우리에게야 글로벌 무역이라는 개념이 익숙하지만, 지구 너머에 상품이 도달하려면 꽤 험난한 과정을 거칩니다. 누군가는 말라카 해협에서 해적을 잡아줘야 합니다. 그리고 물건이 도착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거래의 대가인 화폐도 이동해야 합니다. 그 시스템을 구축하고 관리하는 것도 대단한 비용이 듭니다.

미국은 달러 무역 시스템을 전 세계에 제공하고, 그 대가로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발권력을 얻습니다. 다시 말해, 미국이 얻는 게 적다고 판단하면 발권력을 줄이면서 그 시스템 제공을 줄일 수 있는 거고요. 달러 이용국 입장에서도 미국 기반의 서비스를 이용하기 싫으면 안 하면 그만입니다. 선악 구도의 깡패짓이 아니라, 주고받는 관계에서 최선의 선택을 해나가는 겁니다. (물론 힘이 강한 나라가 유리한 딜을 가져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요. 그건 다른 얘깁니다.)

중국은 이 '시뇨리지'라는 걸 명분으로 해서 미국이 과도한 이익을 거두어들이고 있으니 그놈의 '달러 패권'을 빼앗아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미국은 '달러 패권'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죠. (웃긴 건 중국도 '패권'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아시아에서 패권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중국의 주장은 앞뒤를 뒤바꾼 해석입니다. 기축통화국이기 때문에 발권력을 누리는 게 아니라 힘이 강하기 때문에 기축통화국이 된 겁니다.

중국이 기축통화국이 되기 위해서는 전 세계에 그만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합니다. 무역의 안정성과 금융 시스템을요. 중국은 그럴 의향이 있나요?

7. 트릴레마

경제 이론에는 '불가능의 삼각정리'라는 게 있습니다. 개방경제에서는 한 나라의 외환 정책이 다음 세 가지를 모두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정리입니다. 그 세 가지란 1) 안정된 환율, 2) 독자적 통화정책, 3) 자유로운 자본 이동

예를 들어, 통화정책을 독자적으로 가져가면서(타국의 중앙은행과 상관없이 유동성을 공급하는 등) 자본 유출입을 자유롭게 풀어놓으면 환율이 널뛰기를 하겠죠. 환율을 고정하고 독자적인 통화정책을 가져가고자 한다면 자본 유출입을 막아야 합니다. 자본 유출입을 자유롭게 해두면서 환율이 안정되기를 원하면 독자적인 통화정책은 포기하고 다른 나라의 상황에 어떻게든 발을 맞춰야겠지요.

미국은 독자적 통화정책과 자유로운 자본 이동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므로 환율이 변동합니다. 한국은 독자적 통화정책과 자본 이동을 그때그때 선택합니다. 어쨌거나 환율은 불안정합니다.

중국은 2005년 이전까지 고정환율이었다가 2005년에 바스켓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그랬다가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및 2014-15년 중국 금융시장 붕괴 때 달러 페그제로 돌아간 적이 있습니다. 중국은 우선 자유로운 자본 이동을 금지합니다. 그리고 독자적 통화정책을 반드시 가져가고자 합니다. 1), 2)를 지키면서 3)을 버린 거죠.

위안화가 기축통화가 되려면 3) 자유로은 자본 이동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독자적인 통화정책 혹은 안정된 환율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합니다. 독자적인 통화정책을 포기하면 결국 미국의 입맛대로 중국의 통화정책을 맞춰야 한다는 이야기고요. 환율 개입을 포기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서구 자본주의에 놀아나는 중국의 화폐'가 되는 꼴입니다. 상당히 싫죠.

기축통화국이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자국의 화폐를 타국에 뿌려야 합니다. 자본 유출이 있어야 하고, 그걸 수입으로 회수하는 체제를 갖추어야 하니 무역적자도 감수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미국의 쌍둥이 적자입니다. (한편에서는 쌍둥이 적자 때문에 미국이 망한다고 하고, 한편에서는 달러 패권을 이용해서 미국이 타국을 착취하고 있다고 하는데, 웃기지 않습니까? 둘은 동일한 건데 말입니다.)

중국은 달러 패권을 불편해하면서 위안화를 국제하고자 하는 시도를 합니다. 기축통화가 된다는 게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모르는 듯이 말입니다. 자기에 화폐를 국제사회에 내놓고 자본수지/무역수지 적자를 감수하고, 군사력과 화폐 시스템을 제공해야 기축통화가 될 수 있습니다.

2015년에 IMF 특별인출권(SDR)에 위안화가 편입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위안화가 기축통화로 가기 위한 첫걸음이라며 당시에 이슈가 되었습니다. 국제 결제에서 위안화의 비중은 2015년 2.31%, 2년 후인 2017년에는 1.84%로 오히려 감소했습니다. 2021년에는 1.95%고요. SDR에 편입되는 거랑 국제 결제에 사용되는 건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저 국제적으로 중요한 국가가 되었다는, 중국의 위상을 확인해주는 사건일 뿐입니다.

8.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 건가

달러 패권 이야기로 호들갑을 떠는 분들에게 궁금한 게 많습니다. (아니, 사실은 별로 궁금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실체도 불분명한 '달러 패권'이라는 게 약해져서,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거죠?

1) 달러 약세

달러가 약세로 가는 케이스는 많습니다. 신흥국이 좋은 투자처로 인식되어 그쪽으로 자금이 쏠리면 달러가 약세가 됩니다. 미국 경제가 좋거나 금리가 올라가면 달러가 강세가 되고요. (혹자는 이걸 가지고 '양털 깎기' 어쩌고 하는 이론으로 설명하는데. 하… 세상이 그렇게 간단하게 돌아간다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중요한 건 '달러 패권'이니 뭐니 하는 추상적인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어디가 좋은 투자처로 각광받고 있느냐, 현재 시스템이 건강하게 작동하느냐 같은 거죠.

그리고 정말로, 미국의 힘이 약해져서 달러가 약세가 될 전망이라면요? 거기에 맞게 포지션을 갖추면 됩니다. 굳이 페트로달러니 뭐니 하는 거창한 이야기를 들고 올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페트로달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달러 수요에 몇 퍼센트 영향을 끼칠지 숫자로 살펴보아야 사안의 경중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2) 금융위기

현재 세계는 달러 체제로 굴러가고 있고, 그 근간은 페트로달러니까, 그게 무너지면 세상이 무너진다? 애초에 틀린 이야기니까 반박할 필요도 없지만요. 그게 진짜라면 그 페트로달러를 위협하는 중국과 사우디는 뭡니까? 글로벌 경제의 역적입니까? 그리고 미국은 그걸 왜 놔둡니까? 유럽은요? 전 세계가 나서서 중국과 사우디를 비난하고 경제 제재를 가해야 할 것 아닙니까? 안 그러고 있잖아요?? 중요하지 않으니까 놔두는 겁니다. 양국 간 거래에 양국 중 일국의 화폐를 사용하는 게 뭐가 어떻다는 말입니까 ㅎㅎ

3) 그냥 미국이 싫어

하고자 하는 얘기는 이거겠죠. 미국이 뭔가 깡패짓을 하는 것 같아. 달러는 국제적으로 다 함께 쓰는 화폐인데 그걸 미국 혼자서 좌지우지하는 게 말이 돼? 미국은 돈을 마음대로 찍어내서 부유하게 살고 우리는 이렇게 열심히 노동해야 하고?

이런 느낌을 갖는 건 인간이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힘이 강하기 때문에, 그 강한 힘을 사용해서 자기네 중심의 질서를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건 강력한 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협상일 뿐입니다. '페트로달러'니 '시뇨리지'니 하는 모호한 용어로 마술을 부리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모호한 용어를 가져와서 '달러 패권'의 '몰락'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면 어쩌면 달러가 약해져야만 이익을 보는 어떤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이거나, 혹은 그냥 미국이 싫어서, 미국이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습관적으로 찬동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힘을 기르고, 힘을 잘 활용해서 협상에서 무엇을 얻어낼 것인가입니다. 중요한 것에 집중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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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로달러 체제가 무너진다!?

이 글은 특정 종목이나 업종의 매수매도를 추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투자의사결정은 각자의 판단과 책임 하에 하여야 합니다. 페트로달러는 잊을 만하면 다시 등장하는, 음모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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