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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 입학에 아리팍 내줬다…강남 할머니가 집 나간 이유 본문
나의 어린 시절은 5층짜리 주공아파트 그 자체였다. 그 흔한 이사 한 번 안 가고 신반포1차아파트 스물다섯 평 집에서 20년을 살았다. 활동 반경은 좁디좁았다.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집 앞에 있었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은 단지 앞 상가였다. 학교가 끝나면 태권도장에 들렀고, 한층 내려가 수학 학원에 갔다. 편의점 아닌 수퍼마켓으로 엄마의 야채 심부름을 다녔고, 돈가스 맛을 알게 해준 가게도 거기 있었다. 낡은 계단의 퀴퀴한 냄새가 아직도 기억난다.
유학을 떠났다가 7년 뒤 돌아왔을 때, 부모님은 낡은 그 집에 여전히 살고 계셨다. 하지만 동네는 달라져 있었다. 집 앞에 없던 지하철역(9호선 신반포역)이 생겼다. 길 건너편에서 반포천까지 엄청나게 큰 아파트(래미안퍼스티지)가, 고속버스터미널 옆으로도 그만큼 큰 단지(반포 자이)가 들어섰다. 동네 백화점이었던 신세계백화점은 뭔가 근사해진 모습이었고, 낡고 어둡던 터미널 지하상가도 깔끔한 식당가로 바뀌어 있었다.
무엇보다 달라진 진 건 집값이었다. 일대 전셋값이 너무 비싸 결혼하면서 동네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대략 10년간 서울 신림동, 방배동, 흑석동을 전세로 돌며 살았다. 둘째가 네 살이 됐을 무렵 아버지가 말했다.
" 우리가 나갈 테니 들어와서 살아라. 애들 키울 때 이만한 동네 없다. "
어린 시절 살던 집은 재건축을 거쳐 새집(아크로리버파크)이 됐는데, 우리를 위해 비워주겠다고 하셨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비슷한 시기,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도 하나둘 돌아오기 시작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강남엔 ‘연어족’이 산다, 엄마 집에서…
연어처럼 고향으로 돌아온 ‘반포 키즈’ 박모(40)씨의 사례입니다. 반포를 비롯해 강남에선 부모가 소유한 구축 아파트가 재건축을 거쳐 입주 시점이 되면 결혼한 자녀와 손주들이 들어와 살도록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과정에서 부의 세습이 일어납니다. 원베일리에서 고등학생과 초등학생 자녀를 키우는 최모(44)씨는 증여를 받았습니다.
" 어렸을 때부터 이곳에 살아 부모님이 조합원이었는데 재건축되고 나서 입주 후에 증여를 해주셨어요. 남편 직장이 멀어서 강남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는데, 아이들을 반포에서 키우라고 부모님이 강하게 권유하시더라고요. "
하지만 집을 물려주는 경우는 부담이 큽니다. 소유 아파트가 두 채 이상이거나 엄청난 세금을 감당할 여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강남 부모들은 다른 방법을 찾았습니다. 후대의 성공을 위해 자신들이 낡은 아파트나 소형 평형으로 옮기는 거죠.
한강변 신반포2차에 사는 김모(44)씨도 어머니 집에서 삽니다. 재건축을 앞둔 구축 단지라 매우 낡았지만 리모델링을 한 40평형대여서 가족이 살기에 충분합니다. 이 아파트는 바로 앞에 반원초등학교가 있고, 중학교도 5분만 걸으면 나옵니다. 아이 고등학교도 버스 타면 두 정거장입니다.
김씨 부부는 경기도에 신축 아파트를 갖고 있지만, 아이 교육 여건과 생활 편의 등 고려할 만하다고 생각했답니다. 자가 전셋값으로 반포 신축아파트 전세는 못 들어갑니다. 그래서 엄마 집에 전세 들어 삽니다. 큰 부담 없이 ‘반포 인프라’를 누리는 거죠.
평당 1억인데 3040 가득…부모집 전세가 대세
‘내가 가진 반포 자이 포카들…모으느라 텅장 되는 건 순삭’
한 유튜브 영상의 제목입니다. 어지간한 어른은 이해조차 힘든 문장이죠. ‘포카’는 아이돌 가수의 음반 속에 랜덤으로 들어 있는 포토 카드를 말합니다. 한정판이라 인기 많은 멤버나 특별한 콘셉트의 사진이면 100만원 넘는 가격에 팔리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비싼 포카를 사느라 통장이 텅 비었다는 말입니다. 중간에 ‘반포 자이’는 왜 들어갔을까요?
포카가 하도 비싸게 거래되다 보니 카드에 고가 아파트 이름을 붙이는 하나의 ‘밈(Meme, 온라인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이나 현상)이 생긴 건데요. ‘한남더힐 득템’, ‘트리마제 3개 보유’ 등으로 응용한답니다. 아이들 사이에서도 반포 아파트가 비싼 물건의 대명사가 된 ‘웃픈’ 현실이죠.
반포 자이는 2022년 5월 116㎡(35평) 기준 39억원에 거래됐고, 지난 5월에도 36억원에 거래됐습니다. ‘강남 아파트 평당 1억원 시대’라지만 실제 1억원 이상인 건 압구정과 반포 정도입니다.
이렇게 비싼 아파트에 누가 사는지와 관련해 흥미로운 통계가 있습니다. 행정안전부 자료를 보면 2023년 서울 구별 평균 연령이 44.6세입니다. 이 중 서초구가 42.5세로 강남구와 함께 가장 젊은 자치구로 꼽힙니다. 평균 연령이 가장 높은 강북구(48세)와 무려 5.5세 차이입니다. 특히 반포가 속한 서초구는 아동 인구(0~17세) 비중이 서울 자치구 중 가장 높았습니다.
반포는 자가든 임대든 자산 규모나 소득이 적은 젊은 층이 거주하기 쉽지 않은데도 30~40대 실거주자가 유독 많습니다. ‘비싸면서도 젊은 공간’을 이해하는 키워드가 바로 ‘대물림’입니다. 반포에서 30년 넘게 공인중개사를 하는 조모씨의 설명입니다.
" 반포는 원래부터 젊은 도시였어요.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 젊은 부부들이 강북 구도심을 떠나 정착한 곳입니다. 아이 둘 정도 키우며 초등학교에 보내는 집이 정말 많았어요. 그 아이들이 커서 2000년 전후로 대학에 가고, 취업과 결혼을 한 뒤 부모의 지원을 받아 재건축된 새 아파트로 돌아오는 거죠. 그러다 보니 또 젊은 동네가 됐네요. "
어린 시절 잠원동에서 자란 정모(46)씨는 지금도 같은 동네에 삽니다. 자녀 셋 중 첫째와 둘째는 대학에 들어갔고, 고등학교 1학년인 막내만 남았습니다. 결혼 초기 신반포5차에 전세로 오래 거주했는데, 이 아파트가 재건축(아크로리버뷰)에 들어가 이사를 가야 했습니다. 이때 정씨의 어머니가 30평형대인 자신의 아파트로 들어오라고 했고, 지금까지 전세로 거주 중입니다. ‘강남 할머니’ 덕에 사실상 추가 비용을 거의 들이지 않고 아이 셋을 모두 반포 학군에서 키운 셈입니다.
이런 모습은 대치 등 대입 준비에 최적화된 강남에선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황모(48)씨는 대치동 학원가와 가까운 도곡동에 삽니다. 역시 부모 소유 아파트죠. 부동산 투자에 해박했던 황씨의 어머니는 구축 아파트를 사서 재건축 후 파는 방식으로 부를 쌓았습니다. 아파트 여러 채를 가진 어머니는 딸에게도 투자 노하우를 전수했습니다.
황씨 역시 어머니가 알려주는 구축 아파트를 사서 리모델링 후 시세차익을 보고 팔았습니다. 이 자본금으로 다른 아파트를 샀지만, 전세를 내놓고 대치 학원가와 가까운 어머니 소유 아파트에 전세로 들어갔습니다. 자녀 둘 중 한 명은 의대에 진학했고, 다른 한 명은 유학 중입니다.
강남 부모의 대물림은 돈이나 집을 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자녀에 이어 손자·손녀까지 다른 곳에선 접할 수 없는 ‘인프라 사용권’을 누리게 해주는 것입니다.
아빠 교통, 엄마 교류, 아이 교육 ‘3종 세트’
생활 환경을 물려주는 이들의 특별한 대물림에는 강남이 가진 공간적 특성이 있습니다. 반포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반포는 소위 아빠의 교통, 엄마의 교류, 아이의 교육 ‘3교’를 완벽히 갖춘 곳으로 꼽힙니다. 화장품으로 치면 올인원 제품인데, 각각의 성분까지 좋은 거죠.
서울 전체 지도를 펼쳐 볼까요. 반포가 정말 딱 한가운데 있습니다. 강남 내에서는 물론 반포대교를 넘어 사대문 안으로 곧장 진입할 수 있죠. 5분 정도면 올림픽대로나 강변북로를 올라탈 수 있으니 동서로도 편하게 이동이 가능합니다. 대중교통 여건도 압도적인데요. 고속버스터미널만 해도 3∙7∙9 지하철 3개 노선이 교차하고, 강남역 못지않게 서울∙경기 각지로 가는 버스가 정차합니다. 버스터미널이 있으니 지방으로도 손쉽게 갈 수 있죠.
교통만큼 중요한 게 먹고사는 문제입니다. 강남은 원래 ‘뭘 하든 끝나면 걸어서 집에 간다’가 강점입니다. 놀고, 먹는 인프라가 워낙 잘 갖춰졌기 때문에 강남 사람들끼리 하는 말이랍니다. 특히 반포는 재건축 후 이런 특징이 더 뚜렷해졌습니다. 신축 단지에 붙은 상가 안에 거의 모든 시설이 갖춰져 있고, 백화점 인프라(신세계백화점 강남점)까지 갖췄죠.
" 크고 작은 공원이 여러 개 있고 체육시설도 많아요. 반포한강공원이 코앞이잖아요. 한강이 보이는 것뿐 아니라 여기가 그냥 놀이터예요. 부모님과 가까이 사는데 병원 접근성도 너무 좋습니다. 주변 상가 건물에 내과∙이비인후과∙정형외과 등 꼭 필요한 병원이 다 있고, 심지어 상급종합병원인 서울성모병원도 걸어서 갈 수 있잖아요. 여기 사람들은 그래서 ‘부모님 장례까지 동네에서 치른다’고들 합니다. "
래미안퍼스티지에 사는 유모(46)씨의 말입니다.
재건축 후 10년, 주민 구성이 바뀐다
반포 내 아파트 대부분은 초품아, 중품아 단지입니다. 반포래미안퍼스티지는 잠원초, 반포자이는 원촌초, 리체나 래미안아이파크는 서원초, 재건축 예정인 신반포2차나 4차는 반원초로 배정됩니다. 아파트 단지 내에 없는 경우에도 거리가 매우 가까워 차이가 없습니다.
구축이 신축으로 바뀌면서 높아진 집값은 고소득층을 불러 모읍니다. 교육열도 그만큼 강해 학군이 점점 좋아집니다.
" 예전에야 원천초, 원촌중 이런 데가 그저 그런 학교였지만 그때는 15평짜리 주공이었고, 지금은 최대 90평형 자이를 품고 있잖아요. 원래 재건축하고 10년이 지나면 주민 구성이 싹 바뀐다는 말이 있습니다. 위치만 같지 완전히 다른 주민들이 사는 거죠. "
반포 C공인중개사 대표의 설명입니다.
대치·도곡에 비해 반포는 사교육 인프라가 부족했었는데, 부자들이 몰려들면 학원들도 따라옵니다. 삼호가든사거리 뒤편을 중심으로 대규모 학원가가 조성됐고, 반포 신축아파트 단지 상가에는 ‘시대인재’도 입점했습니다.
압구정 재건축되면 ‘오렌지족의 귀환’
박합수 건국대 부동산대학원 겸임교수는 이렇게 분석합니다.
" 압구정 역시 지금은 70~80대 어르신이 살지만, 재건축이 시작되면 자녀나 손자 세대로의 대물림이 본격화하면서 ‘오렌지족의 귀환’이라 할 만한 대규모 이동이 나타날 거예요. 반포가 그걸 먼저 보여준 거죠. 자산을 가격으로만 보는 사람들이 쉽게 범하는 오류가 ‘오를 만큼 올랐으니 내릴 거라’는 건데요. 그 말이 맞았으면 사실 지금 아파트 가격은 말이 안 되죠. 압구정이나 반포 같은 곳은 이미 최고 수준의 주거지라는 희소 가치를 확인했기 때문에 상당 기간 강세를 보일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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