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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럽고 복잡한 ‘진실의 세계’를 모르고 있었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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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럽고 복잡한 ‘진실의 세계’를 모르고 있었다

DDOL KONG 2024. 4. 5. 06:35

아줌마 연구자로 가까스로 살아남기③ ‘두 개의 한국’을 살아본다는 것

2015년부터 『지방소멸-인구감소로 연쇄 붕괴하는 도시와 지방의 생존전략』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현재의 인구감소 추세대로라면 대도시는 초고령화하고 지방은 공동화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특히 대도시는 지방의 인구를 빨아들이지만 재생산은 못하는 인구의 블랙홀이며, 지방 역시 대도시에 인구를 모두 빼앗겨 생존할 수 없다고 하였다. 매우 수긍이 가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사실 이 책은 한국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의 사례였는데 한국은 일본에서 논의하는 지방소멸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다. 2010년대 중반 이후로 한국에서도 지방소멸과 인구소멸은 심각한 화두로 떠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방소멸과 인구소멸은 나에게 그리 와닿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서 자랐으며 학교를 졸업하고 수도권과 서울에서 일을 했다. 그러다가 2016년 배우자의 직장 때문에 광역시로 잠시 옮겼다가 2019년 경상북도 군 단위의 마을로 이주하게 되었다.

당연한 듯이 이용했던 지하철과 백화점, 대형마트, 스타벅스가 전혀 없는 동네에서 살게 되면서 나는 한국말이 통하는 또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간 느낌이었다. 말은 통하는 것 같으면서도 때로는 잘 통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과 대화할 때면 생경한 사투리와 억양 때문에 머릿속으로는 무슨 뜻일까 끝없이 유추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운이 좋게도 지역의 대학 두 군데에서 강사로 일할 기회를 얻었다.


지역의 국립대와 사립대에서의 경험

한 곳은 그나마 안정적이라는 국립대였으며, 또 다른 곳은 소멸을 걱정하는 사립대학이었다. 두 개의 대학에 출강을 나가면서 그동안 서울에서 내가 봐왔던 대학과 다른 모습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화장실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10여 년 전쯤 고속도로 휴게실에 가면 칸마다 휴지가 갖춰진 것이 아니라 화장실 입구에 휴지 두루마리가 있었다. 화장실의 각 칸을 이용할 사람들은 공용 휴지를 쓸 만큼 끊어서 들어가는 방식이었다. 급한 마음에 화장실 칸부터 들어가서 볼일을 보다 보면 낭패를 당한다.

그런데 내가 출강하는 대학마다 그러한 방식으로 화장실 화장지를 이용하도록 설계되었는데, 내가 운이 나빴던 것인지 화장실을 갈 때면 그 공동의 화장지마저 남아있지 않았다. 그 이후로 나는 편의점에서 휴대용 화장지를 사서 가방 안쪽에 넣고 다니게 되었다. 비상 상황이 벌어지지 않게 대비해야 했다.

하루는 대학의 교직원과 만나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겼다. 조금 민망했지만 화장실 화장지 이야기를 꺼냈다. 돌아온 대답은 예산 부족으로 매번 무한정 채워놓기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매주 월요일에 큰 두루마리 화장지를 채워놓지만, 주중에 떨어지면 그대로 둔다고 한다. 화장지는 아주 사소한 문제였지만 그 정도로 절박한 대학의 사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학과가 없어지게 될 줄은 몰랐다

강의를 나간 한 곳의 사립대는 이미 지방소멸, 인구소멸의 풍파를 그대로 맞고 있었다. 지원하는 신입생이 줄어들고, 학과를 유지할 형편이 되지 못하여 일부 과는 폐과가 진행 중이었다. 학교 시설은 굉장히 낡았는데, 더는 페인트칠이나 수리 등 유지보수를 할 여력도 없어 보였다. 나는 유아교육과에서 교직 강의를 했다. 이미 이 과 역시도 폐과가 진행 중이었다.

날이 갈수록 태어나는 아이들이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에 유치원 역시도 사양산업이라는 것이다. 한때 지역의 대형 사립 유치원 원장들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는 소리가 있었으나 오래전 이야기일 뿐이다. 유치원이 줄어들고 있으니 유치원 교사를 양성하는 유아교육과 역시 직격탄을 맞았다. 신입생은 들어오지 않았고, 나는 여남은 학생들과 수업을 진행했다.

학생들은 끝없이 자신들의 불운을 이야기했다. 여학생들은 대개 부모님의 일손을 거들기 위해 집 가까운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는데, 이렇게 학과가 없어지게 될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폐과가 진행되고 있는 학과에서 일반휴학이나 군입대 휴학은 불가능해 보였다. 복학하고 나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교수들 대다수는 이 지역에 살고 있지 않았다.
이곳 주민이라는 정체성이 없기 때문에,
대학을 넘어 지역사회에 대해 좀 더 깊숙이
관여하는 일도 어려워 보였다.

대도시의 대형마트·화장실이 그리웠다

출강했던 다른 국립대는 사정이 조금 나았다. 당장 폐과가 진행되는 것도 아니었으며 지역에서는 국립대 메리트라는 것이 어느 정도 있었다. 그 지역에서 취직하고 살아가는데, 이 학교의 졸업장은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2021년 지방대학의 대거 미달사태와 함께 이 국립대 역시 등록 학생을 다 채우지 못했다. 지역의 학령인구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으며, 그래서 지역의 대학을 선택하는 학생 역시 줄어들고 있었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놀랍게도 대학에서 알게 된 교수들 대다수는 이 지역에 살고 있지 않았다. 거의 대도시에 본가를 두고 있었다. 기차를 타거나, 자동차를 운전해서 통근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주중 화· 수·목요일 정도만 학교 근처의 원룸에서 지내다가 금요일이면 본가가 있는 대도시로 가는 식이었다.

배우자의 직장이 대도시에 있기 때문에, 아이의 입시나 교육 때문에, 이곳에 내려와서 살림을 꾸릴 형편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주거의 자유가 있는 세상에서 이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결코 없다. 하지만 상당수의 교수가 이곳 주민이라는 정체성이 없기 때문에, 이들이 대학을 넘어 지역사회에 대해 좀 더 깊숙이 관여하는 일도 어려워 보였다.

나는 지역소멸, 인구소멸, 나아가 대학까지 소멸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일상생활은 이어 나가야 했다. 대도시와 비교하면 사회 인프라는 정말 부족했다. 유아차나 휠체어를 쉽게 실을 수 있는 저상 시내버스는 거의 없었으며, 화장실을 가더라도 기저귀 교환대를 찾기 어려웠다. 대도시의 대형마트나 백화점의 수유실과 화장실이 그리웠다. 그러기에 대도시에서 본가 살림을 꾸려나가는 여느 교수들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두 개의 한국’이 공존하고 있다

서울에 살면서 일을 한다면, 대학소멸을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아이를 키우는데 부족한 인프라를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만 같았다. 이러한 고민을 할 리 없겠지 싶어서 친구들에게 물어본 적 있다. 동시대의 서울에서는 미친 듯이 올라버린 아파트 가격과 아이 학원의 레벨 테스트, 학원 스케줄이 문제라고 한다.

이럴 때면 마치 두 개의 한국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제 출생률 저하로 인하여 서울이나 지역이나 인구소멸은 매한가지지만 서로 다른 양상으로 다가온다. 지역의 대학은 입학정원 미달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데 서울에서는 갈수록 더 치열해지는 ‘인서울’ 대학 입시로 인해 더 어릴 때부터 아이들에게 더 많은 사교육을 시키려고 한다.  

만일 내가 경북의 기초 군으로 이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두 개의 한국’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역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그곳에서 나의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는 종종 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렸다. 파란 약을 먹으면 진실의 자세한 모습은 모른 채 살게 되고, 빨간 약을 먹으면 혼란스럽고 복잡한 진실의 세계를 알게 된다.

지역으로 이사 와서 살아가면서 나는 빨간 약을 먹게 된 기분이었다. 직접 살아보기 전까지는, 화장실의 화장지가 칸칸이 갖춰진 대학과 공용 화장지에 의존하는 대학이 공존한다는 사실도, ‘두 개의 한국’이 공존한다는 사실도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17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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