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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 [210530] (긴글 - 의식의 흐름 - 재미없음) 사실 모든 사람은 그냥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다 본문

일상

[공유] [210530] (긴글 - 의식의 흐름 - 재미없음) 사실 모든 사람은 그냥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다

DDOL KONG 2021. 6. 1. 05:16

https://blog.naver.com/likearoma/222374961501

[210530] (긴글 - 의식의 흐름 - 재미없음) 사실 모든 사람은 그냥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전에 어떤 글을 썼다가 후폭풍을 감당하지 못하고좀 쉬었던 적이 있었다.그리고 그 일로 또하나 깨닫게 ...

blog.naver.com

이전에 어떤 글을 썼다가 후폭풍을 감당하지 못하고좀 쉬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일로 또하나 깨닫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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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바쁘게 살다보면 종종 까먹곤 한다.

누가 또 다른 누구의 삶을 대신할 수도 없고 대신해서도 안되고 남을 따라 사는 것도 의미 없다.

바가바드 기타에서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남의 삶을 평생 따라서 사는 것보다 잠시라도 자신의 삶을 사는게 낫다고 말했다. 지장보살은 해탈의 길을 포기하고 모든 중생을 구하겠다고 하면서 지옥으로 들어가지만, 엉겁과 같은 보시를 하였음에도 자신이 구원한 중생한 단 한명도 없다고 했다.

사실 모든 것은 자신의 표현일 뿐이다.
심지어 남을 따라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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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자신의 길은 자신이 지은 업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건 자기 자신이 만든 것일 수도 있고, 부모에 의해 (어쩌면 그가 원하지 않았었을지도 모르는 것일수도 있다) 잠시 유년기에 만들어 진 것일 수도 있다.

업을 만들고 그 길로 사는 것이 운명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책임론에 가깝다.

세상을 살수록 깊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까지가 나가 아닌지, 어디까지가 구별되는 지점인지 점점 더 모호해진다.

몇년전에 내가 썼듯이,
어렸을 적에는 모든 것의 경계가 명확하고 흰색과 검은색이 명확하게 보였는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옳고 그른 것의 경계는 뿌옇게 되고 모든 색은 회색으로 변하는 것 같다.

내가 존재하고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나의 경계를 확인하는 방법은, 사실 단 하나 뿐이다.

남들과 다른 방향으로 노력하여 나아가고 그로 인한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 외에는 나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내가 나임을 꼭 확인해야 하는 이유는??
그건 일부는 생명의 본능적인 부분이고 일부는 내가 존재하다는 사실을 의식속에서 확인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것에 대해서는 글이 길어지니까 쓰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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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목적론적 존재라고 하지만
실제로 인간이 목적론적 존재라는 표현은, 표면적인 표현같다.

사실
이 세상이 모두 같은 하나에서 출발한게 맞다면,
모든 개체의 존재의 시작은, 이것과 저것의 구별(분리)에서 출발된 듯 하다.

이로부터
결국
(존재의 혹은 존재하게된) 목적이 (그게 그 무엇이라도) 생길수 밖에 없다.

물론 그(목적)게 생겼다고 추정하는 것은 의식이 생겨난 후 의식에 의해 정의된 것이다.

모든 것이 같을수 잇다는
아니 같은 것에서 출발했다는
아니 이세상 모든 것이 하나라는 그런 개념은

그것 자체가 "분리" 혹은 "다름"을 유지시켜주는 틀 같은 것이고

시간이 라는 것을 통해 길게 늘어진 그 틀 안에서는,, 잠시 순간적으로 볼때는 확실하기 알수 없지만, 결국 긴 시간속에서 아주 길게보면,, 목적(방향)이 없는 것은 목적이 있는 것으로 수렴되고 하나로 합쳐진다.

//

근원적인 부분에서부터의 고찰 해본다면

결국
이 세상이 동질성(하나)에서 부터 출발했다면
모두가 하나이고 모두가 같은 그런 상태에서는
밀도가 높으냐 색이 어떠냐는 아무 의미가 없다

동질성 안에서는 구별성 자체가 없기 때문에 특징 자체가 의미를 가질수 없다.
기준이 없고 상대방이 없다면 높고 낮고 가 의미가 없어진다.

이 세상의 모든 색이나 특징이나 심지어 언어 조차도, 구별성에 기초를 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빨갛다 라는 것은 다른 것은 빨갛지 않다라는 것에 전제를 둔 것이다.
무겁다라는 것은 다른 것은 무겁지 않다라는 것에 전제를 둔 것이다.
밀도가 높다는 것은 다른 것이 밀도가 더 낮다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니
결국

이 세상의 최초의 출발점이 동질성(하나)이라면
이원성 자체가 어떤 목적론(방향)이 없을 수가 없다.

2개가 되는 순간 이미 2개 자체로 (철학적인든 생물학적이든) 어떤 목적과 이름과.. 그러니까 2개 사이의 구별과 차이 ...

모든 것이 생겨난다.

2개가 되는 순간 어떤 것을 목표하지 않아도 생긴다.

일원론, 일원성, 동질성, 모든것이 하나.. 라는 개념 자체가
2개가 되는, 서로를 볼수 있는, 이질성, 이원성, 상대성을 낳았다면

2개로 분리되는 상대성은 결국 목적성(방향)을 갖는다.

그러므로 존재 자체가 목적성(방향)을 갖는다.
결국
존재 자체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무존재는 하나이며
동질성이며 일원론이다.

존재하는 것 자체는 이원성이며 차별성이다.

이렇게 생각하든 저렇게 생각하든
결국
존재 자체는 목적(방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존재 자체가 다름이며 그것 자체가 현상이며 존재이며 탄생이다.

2개의 구별이 없다면, (이세상이 모두 하나로 아루어졌다면)
존재라는 개념이 생길수 없기 때문이다. (증명 자체가 어렵다)

//

(비록 좁은 의미의 목적(방향)이라는 개념이, 의식 이후 생긴 것이라 하더라도)

그 목적이 세속적이든 철학적이든 무의미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2개가 되어야 존재성을 타인의 것을 통해 증명할수 있다.
2개가 되어야 누군가 누구를 볼수 있다.

2개가 되어야 누군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수 있다.
그러니까 다른 하나를 댓가로(희생하여) 또하나가 존재성을 얻는 것이다.

그러니까 존재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필요한 것이다.
이건 희생이라고 볼수도 있고 도움이라고 볼 수도 있다.

..
그러므로 근원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타인이나 다른 것은 우리가 존재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들이다. 이 모든 것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가 되며 이세상이 하나라면 그것은 존재를 증명할수 없기에 무존재와 아무 차이가 없다.

그러한 모든 것들이 없어지거나 모든 것이 동일하게되면
세상은 사라지고 존재라는 것 자체가 없어진다.

즉 타인의 존재는 결국 나를 위한 것이다.
( 아바타에서 나온 인사 I SEE YOU 라는 의미는 "나는 당신을 본다. 당신과 나는 존재한다. 그러니까 당신 덕분에 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 라는 의미 같다. 또 우리말 "반갑습니다." 또한 "당신은 나의 반과 같습니다."라는 뜻이며, 결국 "나는 나 혼자서 존재가 완성(증명)될수 없습니다. 나의 존재성은 당신으로 인해 완성됩니다. 당신은 나의 반과 같습니다. 반갑습니다." 라는 의미 같다. )
//



인간의 존재의 의미 자체는 (의식의 탄생 후) 인간이 만든 것이고,
(여기서 뭐 원형 의식이라든지 그런건 너무 복잡해지니까 빼고 말하자)

라디컬 하게 보자면, 존재 자체가 유/무 로 있을 뿐,
(좁은 정의로의) 의미는 인간의 의식과 상상 속에서,
유무형 목적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나 도구의 존재일 뿐이다.

의미는 목적을 포장하는 그럴싸한 포장지 같은 것이다.

똑같은 목적이었는데,
포장지가 벗겨저 다르게 보이면
같은 목적인데도 달성하려고 하지 않는다.

딸이 그토록 원하던 단독주택 꼭데기 지붕밑 조그마한 다락방...
그러나 딸이 커버려 결혼을 한 후라면
다락방에 씌워진 의미라는 포장지가 벗겨진다면
결국 그 딸의 아버지는 다락방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지 않는다.


//


동질성을 다시 보자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모든 것이 모두 동일한 것일때에는
경계가 없으므로, 시작도 끝도, 무거움도 가벼움도, 너도,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부터는 존재 자체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존재라함은 무존재를 가정하기 때문이다.

존재라함 자체도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세상이 모두 동일하고 나와 너의 구별이 없다면
존재라는 것이 실제하는 지 알수 가 없고 내가 나인지 내가 존재하는지 여러가지 의문이 든다.

심지어, 눈앞이 캄캄하고 아무것도 볼수 없으며 아무것도 존재하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면, 내가의 나인지, 내가 생각하는 것이 실존인지,시간이 존재하는지 조차도 확인할 방법이 없다.

결국

시간의 흐름, 확인,
공간의 존재

아니 공간이든 뭐든 존재 자체가 존재한다는 확인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원성이 시작되어야 한다.

즉 이세상 모든 것은 나를 위한 것이다.
또 나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

그래서 결국
세상의 창조론에서보면
있으라 하여 무엇이 시작되었다는, 하나( 동질성(으))로부터 이원성이 시작된 현상을 표현하고 있다.

혹 그게 아니면
세상의 창조 자체에 대한 언급이 없이,,
그냥 무한 순환의 속에서 기술을 시작하고 있다.

//

두개가 된 후에는 그것을 통해 그 어떤 것이든 존재성이 확인이 되면서
크고 작음이 시작되고, 드디어 2개 이상일 경우에 2차원 시각적 공간적 개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3차원이 다시 생기게 되고.

결국
타인을 통해 나의 존재성이 확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다름과 같음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끝없이 확인하면서 살아가는데
여기서

이 세상 모든 생명은
두 가지 운명의 굴레속에 있다.

이건 탄생과 죽음.. 즉 모든 것이 하나다 라는 (우리가 인식한 3차원이 아닌 것이다.. 물론 확인할 방법은 없다) 것에서 출발한 개념이다.

이세상 모든 생명은 결국
태어난 이후
실제 현실의 세계속에서 이원성의 증명으로 ( 아닐수도 있다) 들어와
시공간의 순환 속에서 자신의 역할(아무도 모른다)을 하면서...

정해진 시간 공간적 과정을 거친후
우연과 필연과 인과 관계 속에서 여러 과정 후에
결국 나중에는 사라지는 것이다.

(사실 사라진다기 보다는 의식을 담을수 없는 물리화학적 것들로 분해되는 것이다. 합체 상태(신체)를 유지하려는 힘이 다 떨어졌음으로)

//

그러니 이러한 운명속에서
인간은 두가지 상반되는 끝없는 욕망에 시달린다.
이원성에 대한 욕망과 동질성에 대한 욕망을 동시에 갖고 있다.


동질성이라는 아주 깊은 곳에서의 욕망은,
표면적으로 여러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대가없는 아주 훌륭한 인류애나 세상에 대한 사랑, 타인에 대한 배려 등으로 나타낸다.

우리가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든 수백명을 대상으로 하든, 어떤 것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사실

우리가 모두 하나에서 왔고(하나라는 것 자체가 사실 무(없을무)와 같은 것이다) 다시 하나로 돌아가려는 그런 "근원적인 욕망"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아주 길게 보면, 아주 멀리 보면, 결국 저 끝에 죽음이 있다.

//

이에 반해

이원성이라는 아주 깊은 곳에서의 욕망은, 표면적으로 다시 여러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목표에 대한 열망, 열의, 그리고 의지,... 특히 공격과 승리, 패배...
이 모두가 이원성이라는 근원적인 욕구에서 나온 것으로 (나는) 본다.

거꾸로, 그 반대인 순종과 배려 순응 심지어 복종까지도 이것들은 모두 동질성(일원성)의 욕구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이 든다.

//

모든 파동은 위아래가 있다.

(한방향으로의 직진은 파동이 아니다. 사실 확장적 개념에서 본다면 한방향으로의 직진은 그것이 영원하다면 무(없는것)와 같은 것이다. 모든 것은 다름과 차별, 그리고 위아래, 구별성을 통해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영원히 곧바른 직선 자체는 개념적으로 본다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그 직선의 존재를 증명해줄 직전과 색과 밀도가 다른 배경(환경)이 끝없이 존재한다면 그 직선의 존재성을 일부 확인시켜 주겠지만)

결국 사람은, 각자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들을 도와주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물리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표면적으로 는 그래보이지만

결국 지장보살의 말대로

깊은 의미에서는 불가능하다.




나 또한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물리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받을수 있지만
철학적 측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나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다양한 외부적 요인의 하나일 뿐이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지만

(이점에 있어서는 에오의 말이 맞다) 인간의 삶의 의미라는 것은 없다.

우주적 측면에서 본다면, (물론 그 우주는 인간의 가치판단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지구의 존재나 인간의 존재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공간의 탄생과 영원히 순환하는 (이점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 우주 안에서, 우연적 필연적으로 3차원 공간 외의 것을 잠시 아주 잠시 (그것도 소수에게서만) 엿볼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주 잠깐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3차원 공간에서 현실외에 다른 것을 볼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원성에서 나온 인간의 욕심이, 자신의 근원적 이원성, 동질성의 욕구조차 확인하고 싶어하는 수준까지 오게 된다면, 결국 마스터 게임에서 나왔던 수련을 통한 의식수준, 초월 명상을 통한 다른 세계의 엿봄을 시도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도 인간의 족쇄인지 신의 장난인지 아니면 영원한 굴레의 하나인지.... 그 안에 어떤 패러독스가 존재한다.

이미 정신통합(아싸지오리) 등의 책을 수회 정독한 사람은 어느정도 깨닫고 있겠지만,

인간의 자아에 대한 철저한 탐구와 자아에 집중하는 것이 오히려 자아를 벗어나는 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분열된 것들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더 분열시켜야 한다. 그것 자체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들을 붙일 수 없다.

그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서는 이름을 부를수 없다.
어떤 것을 볼수 없다면 인식할수 없다.

그러니까 나무조각이 2개라는 것을 먼저 인식하고 만질수 있어야 그 2개를 본드로 붙일수 있다는 것이다.

내 안의 자아가 1개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 자체가 페르소나(어떤 연기적인 행동을 하는 상황에 맞춰진 껍데기)인지 자아(그나마 근원적 모습)인지 부터 구별할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그 때 왜 그런 짓을 했지"라는 그 때의 그 인격? 페르소나?을 철저히 조각내고 구별해 낼수 있어야 그것을 없애거나 통합할수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정신 분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안에 패턴화되고 시냅스 다발로 자동 반사처럼 된, 일련의 "감정반사 행동 기전"(페르소나 중 일부)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별은

이건 오랜 수련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몇가지 깨달음을 얻으면 쉽게 구분이 가능하다.

내가 지금 어떤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근원적 자아의 모습의 일부가 확장되어 나타난 것인지 말이다.

//

사실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다음이다.
우리가 지금의 이 세상 외에 초월적 세상(다른 차원이나 모두가 하나인 어떤 차원)을 (그것이 존재??한다면) 보려는 방법은 2가지다.

하나는 지금까지 수련과 훈련을 통해 명확하고 선명한 정신적 시야를 얻은 것들을 다 되돌려, 무식하고 무지하게 퇴행하여 다시 죽음으로 되돌아가는 방법. (그럼 죽기 직전에 볼수 있다??)

두번째는 지금까지 수련과 훈련을 통해 명확하고 선명한 정신적 시야를 얻은 것을 통해 해탈하여 (짐이되는 생물학적 특성 조차 버리고) 그 이상으로 올라가는 것

즉, 두개다 모두 죽음을 그 대가로 하고 있다.

하나는 위로 끝까지 올라가 그 위로 올라가는 것 (초월 의식)
또하나는 밑으로 끝까지 내려가 그 밑으로 내려가는 것 (죽음, 깊음 잠)

그러니까 우리가 어려서 무지의 상태로 태어나
지금까지 모든 지혜화 깨달음을 모아왔는데
이 상태에서 근원을 보는 (혹은 경험하는 혹은 느끼는) 아니 근원으로 가는 방법은, 딱 두가지

위로 올라거거나 (해탈)
아래로 내려가거나 (죽음)

그런데 웃긴건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모든 깨달음을 잃어버려
다시 우리가 어디로 가려고 했는지 처음의 목적을 잊게되는 것이다.
(죽기 직전 혹은 죽음이 가까워지면 명료한 의식의 유지가 어렵다. 이걸 극복하려고 수많은 티벳 고원의 수도승들이 수련하고 있다)

그러니까
공주를 구하러 가는 길에, 망각의 숲을 지아야 한다면
(괴물이 없더라도)
결국 공주를 구할수 없게 되는 것이다.

//

이것은 수면사이클과도 대응된다.

티벳 승려들이 수도없이 시도햇지만 거의 성공하지 못한 방법.
꿈속으로 들어가려고 하거나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꿈을 경험하려고 했지만
결국 꿈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NON REM 4단계를 반드시 거처야 하는데 이 단계가 되면 의식이 사라지기 때문에, 사실 꿈속으로 (원래 목적을 기억하는 상태에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헤엄처 건너 가야하는데, 물 위쪽은 거대한 산으로 막혔고
물 바닥 속 굴을 통해 잠수해서 통과해야하는데
그 길이가 길어서 숨을 참고 헤엄쳐가면, 죽지 않고는 통ㅇ과할수 없는 그런 길과 같은 것이다.

즉 죽어야만 건널수 있다
근데 죽으면 (혹은 죽기 직전에 알게되면)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알려줄수가 없다.

//

결국 망각의 숲은, 모든 기억을 지운 후에야 공주를 구할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기억이 지워지면, 공주가 누구인지, 왜 구해야 하는지를 까먹게 되는 것이다.

//

두번째 방법은 모든 승려들이 혜탈을 통해 죽음을 대가로 이룩하고저하는 그런 상태와 같은 것이다. 살아있는 상태에서도 고도의 수련을 통해 정말 잠시만 경험할수 있긴 하지만, 결국 그 안에 들어가는 방법은 죽음을 대가로 할수 밖에 없음을 모든 수행자 모두가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에, 죽는 순간 그러니까 단 한번 자기 생명을 지불하여, 열반(?)의 경지 혹은 초월 혹은 그 무엇이라 불리우든 그것으로 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왜??
왜??

거기 안가면 안될까?

왜 가야하지?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을까

인간은 사방이 막힌 철로된 방에 갇혀사는 존재일 뿐이다.
하얀방, 그 방안에는 음악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시간이 어떻게 되는지도 알수도 없다. 동료도 없다.
배가 고프지도 않고 잠을 자도 변화도 없다.

조용한 상태에서 삶과 죽음과 공간 모든 것에 대해 아무것도 할수 없다.

다만 그 안에 가온데 하나의 버튼이 있다.

만약 그 철로된 하얀 방안에서,
그 인간이 수백년을 살아가야 한다면

그 버튼을 누르지 않고 얼마나 버틸수 있을까
1년? 100년?


호기심? 의무? 상상?
그 어떤 이유든, 몇년을 누르지 않고 버티든
누르지 않을래야 않을수가 없고
또 누르는게 맞다고 본다.

그건 의지의 문제가 아닌 듯 하다

손에 영원히 썩지 않는 레몬이 있다면 , 그리고 레모네이드를 만들수 있는 재료가 있다면
(다른 재료가 전혀 없다면)
레모네이드를 만들지 않고 얼마나 버틸수 있을까
100년? 200년?

..

우리가 몸과 마음과 그리고 정신을 수련하는 것은

결국 그 하얀 철로된 방 안에 갇혀있고
버튼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아니라고 부인을 해도
결국 깔데기 이론처럼 이리로 갈수 밖에 없다.


하얀 철로된 방안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언제 알게 될까

결혼도 해보고,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싸움도 해보고 나쁜 짓도 해보고
고생도 해보고 쾌락도 느껴보고

모든 것을 다 해본 인간은,,

결국 자신이 하얀 철로된 방안에 갇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 방 크기가 가로세로 수백킬로로 넓은 방이라도
수억킬로로 넓은 방이라도

물질적 환상과 생존의 환상이라는 색안경을 벗는 순간
인간의 의미 자체가 의심스러워 지는 순간
왜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순간
.....

잠시 살아있는 동안 누군가를 도와주거나 미워하거나 돈을 많이 벌거나 그 모든 것에 대한 의미가..... 의심 되는 순간...

인간이 만든 모든 도덕과 가치, 심지어 인류애 조차 인간의 존재성의 담보를 위한 허울좋은 껍데기였음을 알게되는 순간....

그리고 이 허울 좋은 껍데기가, 인간의 근원적 욕구인 이원성과 동질성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통찰을 통해 그 근원적 욕구 이전을 볼수 있다는 그런 사실을 깨닫는 순간...

죽고나면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지는 순간
태어날때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궁금해지는 순간

결국 그 하얀 방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


============

인간의 모든 법과 관습은 인간의 생물학적 생존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
그 생존을 위한 다는 사실을 교묘히 숨기고 있지만, 법과 제도와 괍습, 아니 심지어 낮간지러울 정도로 사람들이 칭송하고 숭배하고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는 할머니의 손자사랑, ...

차에 깔린 손자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버린 할머니의 감동적인 이야기 조차도, 그 감동은 우리의 동물학적 생물학적 혹은 관습적 색안경 속에서 감동으로 포장된 것인지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


우리의 삶에 대한 기본적 노력이나 행위 자체를 그만두라는 말이 아니다.
나의 부모님을 사랑하고 내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그만두라는 말이 아니다.

어쩌면

사실

그러한 표면적인 행동, 삶의 궤적과,,, 위에서 말한 해탈에 관한 내용이 별개일수도 있다.
아니 반드시 별개여야만 한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말이다.
아니 심지어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별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젠가

모든 것을 다시 바라볼수 있는 눈을 얻게 되는 순간
그리고 불현듯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되는 순간

그 두개가 합쳐지는 순간이 온다.


예를 들면
실수로 산속에서 길을 잃어 삶과 죽음의 경계를 경험하게 될때
혹은 심각한 병에 걸려, 병원에서 의식을 잃고 생과사를 헤메게 될때
잠시 .... 잠시 그런 순간이 올 수 있다.

그 순간에는
현실적인 삶의 흐름에 동참하는 것, 동참하지 않는 것,
두개의 차이가 점점 더 작아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삶을 더 크게 바라볼수 있고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 조금씩 더 많이 보이게 된다.

물론
그 순간은 관점이 크게 바뀌었지만, 곧 세속적인 환경 속에서 다시 예전으로 되돌아가는 사람이 더 많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순간의 경험이
그 이 후의 그 사람 삶의 과정 아니 삶에 대한 관점을 많이 바꾸어 놓게 된다.

종종
뉴스에 나오는 그런 케이스, 아주 많이 이타적으로 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결국
깊이 깨닫게 되면
이타적이냐 이기적이냐 구분 자체가 의미 없다는 것을 알게된다.
왜냐면
사실 모든 사람은 그냥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그런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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